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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가수 고복수 생애와 히트곡

by Ἀμφίων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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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고복수 생애와 히트곡

고복수(高福壽)는 일제강점기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은 대한민국 가수이다. 그의 히트곡은 <타향살이>와 <짝사랑> 등이 있다. 말년의 삶은 가난하고 힘든 시간이었다. 1972년 생활고와 병마( 뇌신경 고혈압과 식도염)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학력

경상남도 울산 일신 보통학교 수료

경상남도 울산 내선보통학교 졸업

경상남도 부산제2공립상업학교 졸업

고복수의 생애와 노래

1. 출생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고복수는 1911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당시 고고수의 집은 국수 공장은 운영한 덕에 상당히 부유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해 축음기를 틀어 놓고 종일 노래만 따라 불렀다고 한다.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선교사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등 각종 악기를 익힌다. 이때 익힌 음악이 바탕이 되어 울산 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한다.

1933년에 콜롬비아레코드사 주최한 ‘전선(全鮮)아홉 도 시 콩쿠르대회’의 부산대회에 출전해 1등을 차지하고, 1934년에 서울에서(당시 경성부) 열린 전국 남녀 가수 신인 선발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하면서 가수로 데뷔한다. 서울로 올라간 데는 사연이 있다. 당시 콩쿠루는 대부분 기생들이 많이 출전했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일반인 노래하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또한 가수가 지금처럼 우상이 아니었다. 약간 품위가 떨어지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조금 배웠다 하는 사람들은 구경은 하지만 가수가 되지도 않았고, 자녀들이 만약 가수로 나간다면 무조건 반대하고 봤다. 고복수의 부모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열리는 콩쿠르는 '지금까지 유행 가수는 화류계에서 많이 채용했으나 이번 대회는 인텔리 계급의 사람들만 응시 자격이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고복수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고 서울로 올라간다. 하지만 여비가 없었다. 잡화상을 하던 아버지의 눈을 속여 60원을 빼내서 줄행랑치듯 서올로 향했다고 한다.

본선에는 모두 27명이 붙었다. 심사는현제명, 메리 E영, 윤성득 등 당대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었다. 과제곡인 <비련>과 자유곡인 <낙화암>을 노래했다. 결국 정일경, 조금자에 이어 3등을 차지했다. 슬프게 정일경과 조금자는 라디오에 출연하고 음반도 내지만 고복수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후에 오케레코드에서 소질을 알아보고 결국 오케레코드와 전속계약을 맺고 1934년 6월 신보에서 데뷔한다. 1934년 고복수, 강남향, 이난영이 함께 부른 <신아리랑>와 <도라지 타령>이 있다.

 

1934년에 오케레코드의 전속가수로 「타향」과 「이원애곡」이 담긴 음반을 발표했다. 「타향」은 「타향살이」로 재발표되는데, 당시 5만 장이 넘게 팔리며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다. 「타향살이」와 「이원 애곡」 모두 고향을 떠나 유랑할 수밖에 없던 식민지 조선인의 설움을 노래한 것으로,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며, 일제 강점기 최고의 대중가요로 꼽힐 만큼 크게 유행했다.

 

 

<타향살이>에 얽힌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이 어땠는지 잘 보여준다. 고복수 일행이 만주 일대를 순회하며 하얼빈 공연때였다. 무대에서 <타향살이>를 노래하면 청중도 따라 흥얼거리다 노래가 끝나면 다시 앙코를 외쳤고, 나중에 가수와 청중이 함께 부르는 대합창이 되었다. 흥겨움인지 눈물인지 모를 흐느낌과 즐거움이 함께 어우러진 무대였다. 당시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용정 공연에서는 고복수가 <타향살이>를 부르자 한두 명이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울고 고복수도 함께 울며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고복수가 부르는 <타향살이>

고복수가 부르는 <타향살이>

용적 공연 때 한 번은 30대의 부인 무대 뒤로 찾아와 고향인 부산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고복수에게 주소를 주며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남편과 사별하며 너무나 가난한 생활을 살아 고향에 돌아갈 돈도 없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며칠 뒤 망향의 아픔을 안고 스스로 숨을 끊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제로 인해 고향을 잃고 떠돌아다니며 목숨을 잃었을까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무너진다. 고복수의 <타향살이>는 고향을 일제강점기 시절 수많은 실향민들을 위로해 주었다.

 

고복수 단독 최초 음반은 <타향/이원애곡>이다 처음 출시될 때인 1934년에는 <이원 애곡>이 앞면이었지만 타향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재발매될 때는 순서를 바꿔 <타향>을 <타향 사리(살이)>로 바꾸고 앞면으로 옮겼다. <타향>의 작사가인 금릉인은 1935년 대중잡지인 <삼천리>에서 사연을 밝혔다.
 “고향을 떠난 지 어느덧 11년이 되었고, 가끔씩 향수에 젖어 고향을 그리워하다 보면 처량해져서 눈물이 흘렀다”며 “<타향>은 그런 내 심정을 솔직하게 그린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 노래가 인기를 얻은 것은 내 자신처럼 표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마냥 좋은 마음만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향 / 이원애곡 - 고복수 (가요앨범 리뷰, 장유정)


이후 1939년까지 오케레코드에서 「불망곡」, 「휘파람」, 「사막의 한」, 「새날이 밝아 오네」, 「울며 새우네」, 「밀월의 대동강」, 「짝사랑」, 「마차의 방울소리」, 「풍년송」 등을 발표하며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군림했다. 오케레코드사의 전속 공연단인 ‘조선악극단’에서 일본, 만주, 간도 등지를 돌며 공연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1936년 말에 발표한 "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인가요"라는 가사의 〈짝사랑〉이 또다시 히트하고 이은파와의 듀엣곡인 신민요 〈풍년송〉 등으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고복수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오케레코드사와의 불화로 해약을 당한 뒤, 1940년 3월에 조직된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여기서 빅타(Victor)레코드 전속가수였던 황금심(黃琴心)을 반려자로 만났다.

고복수와 황금심 부부

고복수·황금심 부부는 반도악극좌의 후신인 빅타 가극단에서도 함께 활동했고, 1943년에는 새로 창립된 제일(第一) 악극대에도 함께 가입했다. 광복 직전에는 유성(流星)연예대로 옮겨 활동하기도 했고, ‘고복수와 그 악단’을 조직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한편 전옥(全玉)이 주관하던 백조 악극단(白鳥樂劇團)의 주요 단원으로도 활약하였다.

  • 빅타 가극단은 반도 가극단(半島歌劇團)이 1942년 1월에 개칭한 것이다. 경영주인 서민호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고 박구가 맡아 운영하다 1943년 서항석의 <심청전>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나 해방 후 라디오가 보편화되지 않을 때 가수나 배우는 극단을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며 돌아다녔다. 1970년대까지 이러한 극단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고복수 타향살이 표지


3.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붙잡혔다가 국군에게 구출되었다. 자신이 ‘고복수’임을 증명하기 위해 「타향살이」를 불렀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군예대에서 활동했다.


1957년 8월 서울 명동의 서울시공관에서 25년 가수 생활을 결산하는 은퇴 공연을 열었다. 은퇴 후 1959년 서울 회현동의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회점 자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 학원인 동화 예술학원(東和藝術學院)을 개설했다. 이미자(李美子), 문주란, 오기택, 안정애(安貞愛) 등의 인기 가수를 배출함으로써 대중음악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4. 은퇴와 타계까지

은퇴 후 고복수는 여러 사업에 실패하며 생활고에 시달렸다. 1959년에 영화 「타향살이」를 제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서적외판원이나 택시기사로 일하며 생활을 연명했다. 1972년 향년 62세의 나이로 고복수는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다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7년 울산에서 제1회 고복수가요제를 개최했고, 이후 매년 열리고 있다. 1991년 울산광역시 중구 동헌 입구 근처에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졌다. 이 노래비는 2018년 12월 고복수 음악살롱이 개관하면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고복수 음악살롱의 1층은 고복수 선생의 앨범과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2층은 커피숍으로 운영된다.


고복수를 분류할 때 해방 이후의 가수로보다는 일제강점기 가수로 분류한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가장 많은 활동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채규엽, 강홍식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초기의 가수로 분류된다.


황금심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 가운데 맏아들이 트로트 가수 고영준, 둘째 아들이 가톨릭 복음가수 고영민, 셋째 아들이 작곡가 고병준이며, 둘째 며느리는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 손현희이다. 동화예술학원을 경영할 때 배출한 제자로는 이미자와 안정애가 있다.

 

고복수의 대표곡

고복수의 노래 목록은 [고복수의 노래 목록]에서 따로 정리됩니다.

타향살이(원제 타향)
휘파람
사막의 한
짝사랑
풍년송

 

고복수 가요 모음

1. 타향살이

2. 사막의 한

3. 짝사랑

4. 이원 애곡

5. 휘파람

6. 풍년 송

7. 세동 무

8. 꿈 길천리

9. 새날의 풍년

10. 산호채쭉

11. 불망곡

12. 울며 새우네

 


[자료 출처]

위키백과 고복수

지역N문화 식민지 백성의 한을 노래한 민족가수, 고복수

박찬호 <한국가요사1> 미즈북스, "<타향살이> 고복수와 황금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반도가극단(半島歌劇團)

[네이버 지식백과] 타향 / 이원애곡 - 고복수 (가요앨범 리뷰, 장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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