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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전수린

by Ἀμφίων 2021.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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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린(全壽麟)

전수린은 1907년 개성에서 태어난 일제강점기 시절의 가수이다.


전수린은 1907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출석하면서 신문물을 접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엣테소년회 회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바이올린을 배운다. 미션스쿨이었던 송도고보에 다니면서 호수돈여학교 교장 루츠 부인에게 본격적으로 바이올린을 배운다. 이때부터 음악가의 꿈을 키우게 된다.


음악의 세계에 발을 디딘 전수린은 동요를 작곡하고 발표하기도 한다. 이후 작곡법을 배운다. 15세가 되면서 송도고보를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가 홍난파가 주도하는 연악회에 가입한다. 23세 때 뭉요가 조택원의 권유로 동방예술단에 가입한다. 이곳에서 효과나 막간 쇼에서 반주를 담당한다. 1931년 가을 시에론레코드의 창립과 함께 <한숨 고개>를 불러 가수로 데뷔한다. 이후 1932년에 빅타레코드 전속이 되어 이애리수가 불렀던 <황성 옛터> 등을 함께 불러 유명해 진다. <고요한 장안> 역시 이애리수와 함께 불렀다. 조선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한다. 당시 일본의 음악가들과도 교류한다.


전수린은 개성 고향 후배인 최남용에게도 적지 않은 곡을 선물한다. 최남용은 1932년 빅타테코드사 전속가수가 된다. 그해 12월 신보에 <마음의 거문고> <갈대꽃>을 발표하고, 이애리수와 함께 <상사타령>을 부른다. 이후 태평레코드로 계약한다. 1938년 <비오는 선창>을 발표한다.

 


전수린은 1934년 손금홍이 노래한 <무정>은 전수린을 알리는 곡이었다. 전수린은 손금홍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체험을 바탕으로 그대로 가사로 옮겼고, 가사에 맞게 곡을 붙였다고 한다. 작사가요 작곡가인 전수린의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전수린은 손금홍과 어깨를 나란히 한 빅타레코드의 김복희에게도 <애상곡> <제주 아가씨>를 선물했는데 이들 모두 히트곡이  되었다.





1942년 전수린은 다마가와로 창씨개명을 하지만 연예대를 조직하여 만주 등 징역으로 끌려간 이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이후는 충무로에서 악기점을 경영했다. 한국동란 이후 다시 종로에서 악기점을 열었지만 시대적으로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1984년 11월 28일 7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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