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인

이애리수 생애와 대표곡

by Ἀμφίων 2021. 8. 19.
반응형

이애리수 생애와 대표곡

이애리수는 본명이 이음전이며, 경기도 개성출신의 일제강점기 배우겸 가수이다.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그의 대표곡이다. (1910년 1월 1일 ~ 2009년 3월 31일)


이애리수(李愛利秀)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이며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다. 개성은 고려의 도읍지이며, 개경(開京), 송악(松岳), 송도(松都), 송경(松京)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개성은 38선 아래에 위치하여 전쟁이전에는 남한의 경기도에서 관활했지만 전쟁이후 북한 관활지역이 되었다.


한때 본명이 이보전(李普全)으로 알려졌으나 잘못된 것이다.'애리수'라는 예명은 서양 이름 '앨리스'를 음차한 것이라 이애리스라고 표기되기도 했다. 애리수라는 예명은 톨스토이 <부활> 소설을 연극할 때 카추샤로 출연한 적이 있다. 이때 단장이던 김소랑이 이애리수란 이름을 붙여준 것이라 한다. 애리수는 영어 ‘엘리스’이다.

취성좌(聚星座)의 단장 김소랑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9세 때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삼촌 전경희의 연줄로 어린 나이에 무대에 오른 것이 인연이 되어 배우와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이애리수는 신극좌, 민중극단, 취성좌 등에서 아역 배우로 활동하면서 점차 유명한 여배우로 성장했고,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등 흥행극단에서 주연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는 대중가요 시장이 성숙하지 않아 배우가 가수를 겸하던 때였다. 인기 배우였던 이애리수도 막간 가수로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음반을 취입하였다. 1931년에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부른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 등 번안곡이 정식 데뷔곡이다.

이애리수 <라인강>

 

이애리수 <메리의 노래>

1932년에 빅타레코드로 옮긴 뒤 발표한 전수린 작곡의 〈황성의 적〉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여 대중가요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이애리수의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를 소재로 삼아 나라 잃은 슬픔을 그린 이 노래는 1920년대에 만들어져 이애리수가 연극 공연 중 막간에 부르면서 크게 유행하였고, 이때 정식으로 발매된 것이었다. 이 노래는 〈황성옛터〉로 제목이 변경되어 오랫동안 불리고 있다.


가사의 황성은 고려의 송악산 만월대를 말한다. 이미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고려시대의 터인 것입니다. 개성 출신이었던 왕건은 918년 철원을 거점으로 하여 자리를 잡고 있던 궁예를 제압하고 고려를 건국한다. 그러고 나서 919년에 만월대에 터를 잡고 도읍으로 삼았다. 이성계 역시 혁명을 통해 고려 35대 왕으로 즉위한 곳도 만월대이다. 이성계는 후에 조선으로 개명한다.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이다. 1929년 흥행 연극단체였던 취성좌에 입단해 활동한다. 배동필과 결혼해 가정 주부로 살아간다. 2009년 경기도에서 99세로 운명을 다한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서 창가를 대시하여 유행가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연극의 무대 막간에 잠깐 틈을 타서 가수들이 나와 노래를 불렀다. 이들이 부른 노래를 '막간 가요' 가수를 '막간 가수'라고 부른다. 이애리수 역시 막간 가수로 활동한다. <황성 옛터>는 우리나라 '유행가'라는 시작점에 속하는 중요한 노래이다. 특히 황성 옛터는 이애리스의 고향인 개성이기에 더더욱 인연이 깊다.


1930년 지두한이 이끄는 순회극단 연극사는 만주 일대에서 신의주, 평양까지 공연을 했다. 이들은 개성을 거쳐 황해도를 바라보는 온천지 배천에 들어가 있었다. 극단에는 무대 감독 겸 작사가인 왕평,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전수린, 작곡가 김교성, 배우이자 작곡가인 전기형과 배우이자 가수였던 이애리수가 함께 했다.


개성 공연을 마친 왕평과 이애리수는 고려의 영화를 되새기며 달빛 쏟아지는 만월대(滿月臺)를 찾았다.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고려시대 개성은 송도(松都)로 불렸다. 달빛이 환한 왕성의 옛터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폐허가 된 옛 왕성(王城)을 보고 있자니 풀벌레 소리와 함께 쓸쓸함이 몰려왔다.


당시 전수린은 민족이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 괴로워할 때 이곳에서 옛 영화를 누린 시절을 회상하며 말없이 돌아왔다고 했다. 비가 내려 공연은 할 수 없었다. 이때 악상이 떠올라 바이올린을 들어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멜로디를 붙였다. 그걸 그대로 오선지에 그린 것이다. 왕평이 이야기를 듣고 가사를 붙였다. 그해 가을, 단성사가 극단 취성좌(聚星座)에서 연극할 때 막간에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처음 선보였다.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고, 발을 구르기도 했다. 절망적일 정도로 애절한 당시의 상황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 취성좌(聚星座)는 우리나롸 최초 신파극단이었던 혁신단(革新團)의 공연이 어렵게 된 무렵인 1918년 2월에 김소랑(金小浪)을 좌장으로 하고 숙련된 배우 수십 명으로 결성된 대표적인 신파극단이다.  극단을 이끌었던 김소랑 마호정 부부가 재정적인 이유와 건강상으로 버틸 수 없어 1929년 말엽에 해산한다.


이 노래를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32년 빅타레코드 4월 신보에 <황성의 적>이란 제목으로 발배되자 순식간에 5만 장이 판매된다. 이것을 좋아할 리 없는 일본 순사들은 곧바로 그들을 불러 취조한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민중에게 조선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자각시킬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발매 금지시킨다. 총독부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게 했고, 발견 즉시 심문하고 취조했다. 대구의 어느 보통학교에서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가 교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빅터레코드 전속가수들: 왼쪽부터 이애리수, 김복희, 강석연


이애리수는 전문 가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진성의 소박한 가창법으로 노래하였고, 193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전문 여가수들이 등장하면서 인기가 수그러들었다. 1931년 ‘베니스의 노래’는 이탈리아에 있는 물의 도시 베니스(Venice)를 모티브로 지은 곡이다. 아마 이 때를 기준으로 이애리수는 더 이상 음반에 취입하지 않은 듯하다.

 

이 무렵 두 번이나 음독자살 소동을 벌인 끝에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애리수의 결혼 사연은 <라인강>의 담은 마음과 비슷하다. 남자의 부모들이 강력하게 결혼을 반대해 이애리수는 두 번에 걸쳐 남자와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자해하여 죽으려 했다. 보다 못한 남자의 부모들이 겨우 허락하여 결혼에 성공한다. 다만 가수인 것을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 결혼식도 하지 말라는 조건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아들도 대학 다닐 때 어머님이 <황성 옛터>를 부른 가수인 것을 처음 알았을 만큼 과거를 함구했다고 한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100세에 단 1년만을 남겨두고 노환으로 별세했다. 당시 나니는 99세였다.

 

[자료 출처]

박찬호 <한국가요사1> 미지북스

위키백과 이애리수

농민신문 [그 노래 그 사연] 이애리수 ‘베니스의 노래’…베니스 물길 따라 나그네 외로움 흐르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취성좌(聚星座)

사진 김소랑 김남석의 연극이야기 <48> 극단의 마지막 모습들

사진 빅터레코드 전속가수들 일제시대 인기가수 이애리수, 김복희, 강석연, 1930년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