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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장세정, 일제강점기가수

by Ἀμφίων 2021.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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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즈음까지 왕성하게 활동한 가수이다. 1921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2003년 2월 17일 타계했다.

가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박향림 등과 왕성하게 활동했던 가수이다.

 

1921년 5월 28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리모토 세이테이(張田世貞)이다. 아버지 장한무(張漢武)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전하는데,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조직부 부원 장한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으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아버지가 독립군으로 활동한 탓에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떨어져 살았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생후 2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선교리에서 유정(柳町)으로 이사한 뒤 평양 남산(南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기록에 따라서는 경림(敬臨)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고 하기도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 여자 보통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후 평양 화신(和信) 백화점에서 근무하다가 오케(Okeh)레코드를 운영하던 이철(李哲)의 눈에 띄어 가수로 발탁되었다. 평양의 화신 백솨점은 신태화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화신상회에 연원을 둔 백화점이다. 1931년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박흥식에 의해 매수되어 백화점으로 새롭게 설립된다. 장세정은 이곳에서 상신 악기점에서 점원으로 있었다. 15세 무렵이어던 1936년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가요 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해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발탁해 가수로 활동했다고 한다. 1936년 11월 평양방송국 개국방송에 출연하여 가수로 이름을 알렸다.

 

오케 연주회가 평양에서 열렸다. 오케레코드 대표였던 이철은 평양에 노래를 잘하는 소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란봉 망월장에 그녀를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 오케레코드 직원들은 당장 음반을 내자고 했으나 이철은 선전 효과를 내기 위해 콩쿠르를 열어 선발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열린 것이 평양 콩쿠르 대회이다. 이곳에서 장세정은 일등을 했고, 송달협이 2등으로 입상한다.

 

1937년 2월에 공식적 데뷔곡인 <연락선은 떠난다>를 발표했다. 이철은 장세정을 '평양이 낳은 가희'로 선전했다. <연락선은 떠난다>는 발매  즉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고, 장세정은 일약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처음 발매되었을 때 '아이 울지 마서요'라는 부분이 선정적이라는  핑계로 발매 금지시켰다. 또한 탄식 부분을 수정하고 가사를 일부 수정해 재 발매했다. 

 

장세정 <연락선은 떠난다>

1937년 12월 신보에서 김정구와 듀엣으로 <백만 원이 생긴다면>을 불러 대히트를 쳤다. 1937년 백만 원이 얼마나 되었을까? 어지간한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이상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남겨진 문헌에 의하면 1934년경 10만 원이 지금의 백억 원에 상당하다고 한다. 그럼 백만 원이면 1000억이 된다? 하.. 정말 엄청난다. 그러니 비행기 한 대 산다는 말이 나올만하다.

 

만약에 백만원(百萬圓)이 생긴다며는
금(金)비녀 보석(寶石)반지 하나 살테야 음
그리고 비행기(飛行機)도 한 대 사 놓지
하늘 공중(空中) 높이 떠
빙글빙글 돌아서
아서라 백만원(百萬圓)에 꿈을 꾸다가 청춘(靑春)의 인함박을 뒤집어 쓰겠오

만약에 백만원(百萬圓)이 생긴다며는
그란-드 피아노도 한 대 살테야 음
요것이 욕심(慾心)이란 부한당(不汗黨)이야
안 사주면 난 싫어
울기는 또 왜 울어
이것 참 야단났군 백만원(百萬圓) 꿈에 부부간(夫婦間) 가정대전(家庭大戰) 폭발(暴發)이 되겠오
 
만약에 百萬圓이 생긴다며는
인조견(人造絹) 치마적삼 해 입을테야 음
남은 건 막걸리나 죄다 삽시다
그건 사서 뭘해요
두고 먹지 무얼해
아서라 헛(虛ㅅ)소리에 헛(虛ㅅ)꿈 꾸다가 보리밥 비지찌개 다 식어 버렷네

 

이후 1943년까지 약 100여 곡을 발표했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아시나요>, <불망의 글자>, <백만 원이 생긴다면>(이상 1937년), <토라진 눈물>, <남장미인>(이상 1938년), <항구의 무명초>(1939년), <잘 있거라 단발령>(1940년), <역마차>(1941년), <목화를 따며>(1942년) 등이 있다. 발표한 곡 가운데 <하누님 맙쇼>(1938년)와 <편지와 전화>(1939년)는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가두 연주 금지 등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음반을 내는 동시에 오케레코드 전속 공연단체인 조선악극단에서도 주연으로 활동했고, 여성중창단 저고리 시스터즈의 일원으로도 인기를 모았다.

장세정 <항구의 무명초>


1940년을 전후해 이철과 사실상 부부로 생활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 일시 일본에 거주하며 성악가 하라 노부코(原信子)에게 발성 지도를 받았다. 오케레코드 사장이었던 이철은 당시 극단의 리더 격인 이난영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이철이 장세정을 더 맘에 들어했으니 이철과 이난영 사이에 냉기가 돈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일본으로 건너간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가들도 있다.

 

1940년 11월에 임시 발매된 <잘 있거라 단발령>은 고음과 여운이 어우러진 장세정의 뛰어난 가창력을 살린 노래이다.

한 많은 단발령에 검은 머리 풀어 쥐고
한없이 울고 간다 한없이 울고 간다
아아아아 아아 아아 아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두 눈에 피가 흘러 시들어진 진달래는
한 많게 붉었고나 한 많게 붉었고나
아아아아 아아 아아 아아
정든 님아 잘 있거라

 

1944년 6월에 이철이 사망한 이후에는 신협(新協)악극대 소속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일전쟁이 확대되자 일본 제국주의 군국가요 보급에 동원되어 <지원병의 어머니> <그대와 나> 등의 친일가요를 불렀다.


광복 이후에는 백두(白頭)악극단, 악단 제일선(第一線), 강남(江南)악극단 등 여러 단체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으나, 주로 김해송이 이끈 K.P.K악단 무대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1948년부터 다시 음반도 발표하기 시작하여 <울어라 은방울>(1948년), <백팔염주>, <여인애가>(이상 1949년), <고향초>(1952년), <샌프란시스코>(1953년) 등으로 인기를 모았다. <울어라 은방울>은 남한에서 실시된 총선건 직전에 발매되었다. 경쾌하고 즐거운 폴카 리듬을 넣었다.

 

김해송이 이끄는 K.P.K 활동 뿐 아니라 이난영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가수 중 한명이었다. 그 당시 일본에서 귀국한 탱고 밴드 마스터 한두신과 결혼한다. 악기점과 스튜디오를 경여하며 '블랙아이즈'라는 탱고 밴드도 결성한다. 하지만 6.25 동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가장 큰 재산은 목소리가 있었기에 전쟁 중과 후에도 다양한 노래를 발표한다. 대구 피난 시절에 취입한 노래가 바로 <고향초>다.

 

196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가수 활동을 했지만 잠깐 월북을 하여 그는 금지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1973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8년 재미 한국인들이 로스앤젤러스 슈라인오라토리움에서 '장세정 은퇴공연'을 열어 주어, 그녀이 말년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었다. 

미국으로 간 지 몇 해 되지 않아 지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거동을 하지 못하고 실어증까지 겹쳐 오래 투병을 하다가 2003년 2월 17일에 타계했다.

 

[자료출처]

 

유차영 [그 노래 그 사연] 장세정 ‘고향초’…피난민 아픔 어루만져준 가희 (농민신문)한국콘텐츠 진흥원 장세정

박찬호 <한국가요사1> 미지북스

농촌여성신문 일제강점기 여가수 ‘넘버2’로 군림한 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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