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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왕수복, 생애와 히트곡

by Ἀμφίων 2021.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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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수복


왕수복은 평양 기생학교 출신 가수이며, 해방 후 북한에 머물며 북한에서 활동했다. 2003년 6월 1일 사망했다.


왕수복(王壽福, 1917~2003)은 1917년 4월 23일 평안남도 강동군 입석면 남경리에서 화전민의 막내로 태어났다. 1928년 3월에 평양 기성(箕城) 권번(券番)의 기생학교(3년제)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1933년 기생 출신으로 창작가요 첫 레코드 취입 가수가 되어, 처음 5월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 ‘한탄’을 취입하였다. 논란 끝에 폴리돌 레코드사의 전속이 되어 ‘고도의 정한’, ‘인생의 봄’ 취입으로, 당대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이듬해 1월 8일 경성방송국(JODK)에서 생방송으로 왕수복의 노래가 일본에 첫 중계 방송되었다. 1935년 잡지 『삼천리』 주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 전체 1위를 하였지만, 일본 ‘유학’의 뜻을 구체화하면서, 기성권번의 기적을 반납하였다.

 

인기정상이었던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 음악을 공부했다. 귀국해서는 메조소프라노 가수가 된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낯설었던 조선 민요를 서양 성악창법으로 불렀다. 


이듬해 동경의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이태리 음악체계를 배웠고 1938년 12월 일본 동경군인회관 ‘무용음악의 밤’ 공연을 하여, 최초로 조선 전래의 노래를 서양식 창법으로 노래하여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1941년에 소설가 이효석과 불꽃같은 사랑의 추억을 남겼다. 

 

소설가 이효석과 경제학가 김광진의 연인이기도 하다. 1942년 이효석이 사망할 때 그의 임종을 곁에서 지켰다고 한다. 그 이후 시인 노천명의 연인이었던 김광진과 결혼하여 해항후 함께 월북하여 평양에서 계속 정착한다.

1955년 3월에 북한 국립 교향악단 성악가수가 되었으며, 한 달간 소련으로 파견되는 조선 해방 10주년 경축 예술단 소속으로 ‘조선 가요의 여신’이 되었다. 

 

1963년 북한 TV에 출연하여 노래를 불러 공훈배우가 되고, 1983년에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민요가수’ 활동으로 명예가수가 되었다. 2003년 6월, 86세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4월 북한 국립묘지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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