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생애와 히트곡
남인수(南仁樹)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활동했던 대한민국 가수이다. 1918년에 태어났으며 1936년에 데뷔하여 1962년에 사망했다.
남인수는 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개가하여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간다. 본명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어머니의 재가로 강문수(姜文秀)로 바뀐다. 남인수라는 이름은 후에 작사가였던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남인수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전해지는 설에 의하면 소년 시절 일본 사아타마 현에 건너가 전구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보통학교만 졸업했고, 음악에 대한 공부는 전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인수는 천성적으로 미성을 가졌고, 음악에 대한 놀라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경성으로 언제 올라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데뷔 전까지 경성으로 올라와 일을 하고 있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경성에서 세에론레코드를 찾아가 노래를 불렀고,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고 한다.
1936년 7월 <눈물의 해협>을 발표하여 데뷔한다. 레코드 발매에 앞서 1936년 5월 30일에 김해화, 신난수와 함께 라디오에 출현하여 그해 12월에 <비 젖는 부두>를 발표한다. 레코드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남인수의 노래를 들어본 오케레코드 사장인 이철이 작곡가인 강사랑과 함께 오케레코드로 스카우트한다.
오케레코드에 와서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의 <범벅 서울> <돈소 싫도 사랑도 싫소>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1936년 ‘송년 특별 신보’로 발매 된다. 이때부터 강문수가 아닌 남인수란 이름을 사용한다. 1937년 남인수는 그의 첫 히트곡인 <인생극장>과 <물방아 사랑>을 발표한다. <물방아 사랑>은 남이수를 최고의 인기스타로 만든다. 이후 남인수는 부르는 노래마다 대부분 큰 인기를 얻는다. 그 중의 하나가 1938년 정원신보로 발표한 <애수의 소야곡>이다.
<애수의 소야곡>은 그 이전의 인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레코드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서 몰려던 레코드 상인들이 회사앞에서 진을 치고 레코드를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1938년의 <꼬집힌 풋사랑>은 화류계의 덧없는 운명을 노래한 것인데 당시 영화 배우 한은진이 대사를 맡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작인 <애수의 소야곡>을 능가하는 판매고를 올렸다고 한다. 서울 청진동의 어느 요정의 기생이 이 노래를 듣고 음독 자살한 적도 있었다. 두 노래로 말미암아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이난영과 쌍벽을 이루는 가수가 되었다.
남인수가 부르는 <애수의 소야곡>
가사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
차라리 잊으리라 맹세하건만 못생긴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구나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구나
이후 남인수는 계속하여 히트곡을 발표한다. 30년대 말이되자 태평레코드에서 이재호와 백년설 콤비가 혜성처럼 등장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남인수는 그들에게 약간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1940년 정원 신보에 남인수의 또 메가 히트곡이 발표된다. <울며 헤진 부산항>은 남인수가 특별한 사랑한 노래로 앵콜이 나오면 항상 이 노래로 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회공연 중에 폐결핵이 악화되어 무대에서 피를 토하는 일이 일었어났다고 한다.
남인수가 부르는 <울며 헤진 부산항>
가사
울며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
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정들은 사람끼리 음~
달빛아래 허허바다 파도만치고
부산항 간곳없는 수평천리길
이별만은 무정터라 이별만은 야속터라
더구나 못잊을 사람끼리 음~
해방 후에도 남인수는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육이오 전쟁 당시 불렀던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그 세대를 비롯해 이후의 세대들에게고 ‘남인수’라는 세 글자를 각인시켰다. 아마도 현대인들은 남인수는 곧 <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다. 그러나 1961년 한국연예협회가 창립되면서 부이사장이 되었지만 폐결핵이 발병하여 고향으로 내려간다. 마지막 얼마 동안 남인수는 이난영과 함께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1962년 6월 26일 끝내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고작 45세였다. 1970년 후반에 고향이던 진주에 그의 동상에 세워지고 ‘가요 황제’라는 애칭이 붙었다.
남인수 <눈 감아 드리오리>는 이난영과의 짧았던 사랑을 생각하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병상에서 취입한 노래이다. 이 부분은 이난영 생애에서 더 자세히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