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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이화자, 화류춘몽의 가수

by Ἀμφίων 2021.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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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자(李花子)

 

이화자는 출생과 생애가 그리 명확하지 않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화류계 출신의 가수이다.

 

 

이화자는 1916년 즈즘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이 시작될즘 마약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출생과 가수 이전의 생애는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13세때부터 술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19세 정도인 1935년 김용환에 의해 가수로 전향한다. 전해오는 바로 술집에서 일하던 이화자를 김용환이 찾아가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가요계의 대부로 불렸던 김용환은 경기도 부평에 노래를 정말 잘한다는 어떤 여성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흘려들었지만 하도 소문이 무성히 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당시 가수가 흔하지 않은 시대였기에 한 사람이라도 찾는 것이 그의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인 몇이서 이화자를 찾아 부평에 도착한다. 그때가 1935년이었다.

 

 

이화자가 머물던 곳은 허름하고 초라한 술집이었다. 술집에 들어서니 한 아가씨가 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태극문양이 그려진 부채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화자 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얼굴은 개기름이 흐르고 추녀였기 때문이다. 괜히 왔다 싶었지만 온 긴에 술이나 한 잔 하자며 앉았다.

 

 

술을 받고 이화자가 따라 준 술을 한 잔씩 마셨다. 그냥 가기가 그래서 이화자에게 노래를 한곡조 청했다. 이화자는 능청스럽게 술을 한 잔 마시더니 목청을 가다듬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얼굴은 정말 아닌데 노래는 기가막히게 잘했던 것이다. 김용환 일행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일행은 이화자에게 감탄을 하면서 내일 서울로 꼭 와달라고 부탁하고 일어선다. 그렇게 이화자는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김용환은 포리도루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화자는 뉴코리아레코드에 입사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니 김용환은 뉴코리아레코드와 친분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36년 3월 2일 이화자는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 등과 함께 뉴코리아레코드 전속 가수가 되었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했다. <신춘(新春)> <섬 시악시>를 노랬고, <섬 시악시>는 그해 5월 신보로 발매된다. 한 달 뒤인 6월에 <시악시 열여덟> <뽕도 따고 님도 따세> 등을 발표한다. 9월에는 <단풍이 들 때>, 10월에는 <편지>를 발표한다. 그리고 포리도루레코드로 옮겨간다. 아마도 곧바로 포리도루레코드에 들어가지 못해 잠시 뉴코리아레코드에 머물지 않았는가 싶다.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자 김용환의 소속된 포리도루레코드에서 이화자를 전속가수로 영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이난영이 전국적인 스타로 막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이난영은 가요계의 최고봉이라면 이화자는 민용풍의 노래로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된다. 포리도루레코드에 이적한 이후 이화자는 계속하여 민요풍의 노래를 취입했다.

 

포리도루레코드에 이적하여 낸 첫 노래는 1937년 1월 신보에 발표된 <천리몽>과 <말씀하세요 네>였다. 이후 구정신보에 <동풍이 불어오면>, 2월 신보에 <네가 네가 내 사랑> <정월 보름>, 3월 신보에 <실버들 너훌너훌>, 4월 신보에 <금송아지 타령> 등을 줄이어 발표한다. 이화자의 인기는 이난영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얼마나 유명했던지 거리마다 이화자의 노래가 흘러 나왔고, 재일 조선인을 상대로 한 쇼 무대에서는 가짜 이화자가 등장할 정도였다고 한다.

 

1938년 이화자는 오케레코드 대표인 이철이 그는 자신의 오케그랜드쇼에 참가 시킨다. 아마도 거액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스카우트해갔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화자의 이화자 다움은 오케레코드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8년 이화자는 오케레코드 첫 노래로 <꼴망태 목동>과 <님 전 화풀이>를 발표한다. <꼴망태 목동>은 이화자를 민요가수로의 명성을 높인 최고 인기곡이다. 이화자 하면 <화류 춘몽>과 더불어 <꼴망태 목동>으로 대변된다. 이듬해인 1939년 1월 <어머님 전 상백>을 발표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이후 신민요인 <삽살개 타령> <화류춘몽> <화륜선아 거가라> 등을 발표하여 조선 최고의 가수가 된다. 엄청난 돈을 얻게 되었고, 남성들과의 관계로 수많은 스캔들이 떠돌았다. 인기가 많기도 했지만 그녀의 독특한 개방스러운 성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난영은 오직 가정 밖에 몰랐던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난다.

 

이화자의 <화륜선아 가거라> 

 

가사
철석간장 녹여두고 가는 곳을 물어보자
피눈물 어릴 제 기적이 뚜우
허풍선이 사랑 속에 속아서 맺은 정이로구나
오냐 오냐 잘 가거라

천금같은 내 청춘에 이별이란 왠 말이냐
떠나는 화륜선에 물결이 출렁
내 품속에 울던 임아 마음이 변해 원수로구나
오냐 오냐 잘 가거라

화륜선아 잘 가거라 만경창파 잘 가거라
몸부림 치며 울때 바라가 땡땡
화류신세 계집애도 사랑이 있어 병이로구나
오냐 오냐 잘 가거라

 

 

이화자는 오케그랜드쇼 무대에서 여왕 같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힘든 담배를 피웠고, 40년대 즈음에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순회 공연 중에도 아편을 하지 않으면 공연을 하지 못할 지경이라 아편이 떨어지면 소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화자의 마지막 히트곡은 <목단강 편지>이다.

 

이화자 <영산홍> 1942년

 

해방 후 이화자는 이전처럼 인기를 얻지 못했다. 비록 무대에 서기는 했으나 아편으로 찌든 그녀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1950년 그녀는 35세라는 나이로 마지막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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