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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가요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가사, 백영규

by Ἀμφίων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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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작사

작곡

노래 백영규

 

 

 

 

 

 

가사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지금은 어디 살고있나

내품에 안겨 울던그밤 그후론 만날 수 없네

인천에 성냥공장 아가씨는 가슴도 벅찬 내 첫사랑

그녀가 건넨 손수건은 이별의 마지막 선물

그렇게 청춘은 떠나가고 사랑도 이별 떠나가고

아 그리워라 내청춘, 울고 웃엇던 첫사랑

소나기 같은 첫사랑, 낡은 앨범을 넘기며 바람난 향기 취했어

언덕에 홀로앉아 흘러가는 구름에

첫사랑 그려본다 꿈만 같던 첫 사랑

인천의 성냥공장 그 아가씨 그리워

자유공원 그 벤치에서 그시절 그린다.

 

그렇게 청춘은 떠나가고 사랑도 이별 떠나가고

아 그리워라 내청춘, 울고 웃엇던 첫사랑

소나기 같은 첫사랑, 낡은 앨범을 넘기며 바람난 향기 취했어

언덕에 홀로앉아 흘러가는 구름에

첫사랑 그려본다 꿈만 같던 첫 사랑


인천의 성냥공장 그 아가씨 그리워
자유공원 그 벤치에서 그시절 그린다.
인천의 성냥공장 그 아가씨 그리워
자유공원 그 벤치에서 그시절 그린다.

 

 

노래 해설

 

야함의 극치를 이루는 이 노래가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라니 기가막할 정도다. 하지만 역적 배경을 들여다보면 아픈 노래다.

성냥은 1980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매우 긴요하게 사용된 물건이다. 6-70년대는 이사 가면 성냥을 선물했다. 불처럼 집이 흥하라는 뜻도 있지만 성냥이 요긴하게 사용된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1880년 개화승인 이동인이 일본에서 수산사로 다녀와 귀국하면서 성냥을 가지고 들어온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면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성냥공장을 세운다. 물론 조선도 필요했다. 군산과 수원, 영등포, 마산과 부산 등지에 큰 성냥 공장을 세웠다. 당시 성냥 만드는 기술은 일급비밀이었다. 한국 시잠을 독점해서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당시 성냥 한통에 쌀 한 되라는 말도 안 되는 비싼 값에 팔았다. 

성냥공장 아가씨 일하는 모습



광보 후 한국사람에 의해 최초의 성냥공장이 들어선다. 그곳이 바로 인천이었다. 물론 인천만 있었던 것으 아니지만 당시 인천은 많은 물자과 신물이 오가는 곳이었기에 사이다를 비롯한 성냥 역시 인천이 주도했다. 이름은 대한 성냥이었다.

가스나 연탄이 없었던 시절 성냥은 모든 집에서 가장 필요하고 매일 몇 번에 걸쳐 사용되는 필수품이다. 밥을 할때는 물론이고, 곤로나 호롱불에 불을 붙일 때 역시 성냥이 필요했다. 담뱃불은 어떤가? 

70년대 이후 기계화 되기는 했지만 그 이전에는 정말 고가에 팔렸다. 그래서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아가씨들이 몰래 팬티 속에 성냥을 숨겨 오곤 했다. 문제는 당시 성냥은 불완전해서 종종 작은 마찰에도 불이 붙곤 했다. 그래서 팬티가 빵구나고 홀랑 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만들었던 성냥은 돌 등에 힘껏 치면 불이 붙는 딱성냥이었다. 그러니 성냥끼리 부딪히면 불이 날께 뻔하다.

생각하면 우스운 동시에 마음이 아픈 시대의 노래다. 

 

대한민국 마지막 성냥 공장 <성광 성냥 공장>

 

남보원이 부르는 <인천 성냥 공장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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