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의 생애와 히트곡
(李蘭影, 1916-1965)
이난영은 전라남도 목포 출신의 대한민국 트로트 가수이다.. 대표곡으로는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가 있으며, 일제강점기 활동했던 최고의 가수이다. 가수였던 김해송과 결혼하였으며, 자녀들을 음악가로 키웠다. 1965년 4월 11일 서울 회현동에서 알코올 중독증으로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출생과 어린시절
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부 양동 72번지에서 태어난다. 아버지 이남순(李南順)은 철공업을 했다. 아머니는 박소아(朴小兒)였다. 위로 두살 많은 이봉룡이 있었다. 아버지 이남순은 그당시 남자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술중독자였고, 집에 관심이 없었다. 이난영은 1923년 4월 2일 현재의 북교초등학교인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학적부에 기록된 이름은 이옥순(李玉順)이다. 이옥례(李玉禮)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는 이름이 여러개 사용되었다는 점은 감안한다면 이옥례(李玉禮)라는 이름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아마 가족이나 본인만이 알 일이다.
다른 과목은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유독 음악(당시 창가)는 최고점수인 9점을 받았다고 한다. 가정 형편상 4학년이 되던 해 자퇴를 하고 조선면화공장이라는 솜을 타는 곳에 취직한다.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는 극도로 사이가 좋지 않아 제주도로 오빠 이봉룡과 함께 떠나게 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나 제주도에 머물면서 일본인 가정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 일본인 주인은 제주도 최초 극장인 창심관(暢心館)의 주인이었다. 이난영도 어머니를 도와 극장의 잡일을 하고 있었다. 주인은 이난영의 노래를 듣고 그곳에서 노래를 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이봉룡은 영사기사로 일했다.
제주도인 까닭에 제 시간에 영화 필름이 도착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럴때면 유량극단이 펼쳐졌다. 그 사이마다 이난영이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안타깝게 극장에 화재가 일어나고 극장은 사라진다. 하지만 주인은 이난영의 실력이 아까워 삼천리가극당에 추천해 취직하면서 제주도를 떠나게 된다. 딸이었던 김시스터즈의 김숙자의 증언에 의하면 이난영은 제주에 있을때 물질(해녀)도 했다고 한다.
음반취입과 목포의 눈물
제주도를 떠나 삼천리가극단에 소속되어 순회 공연을 하게 된 이난영은 1932년 가을 즈음에 태양극장에 가입해 막간가수로도 활동을 한다. 이때 태양극장의 극단작이었던 박승희가 예명으로 이난영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하지만 오사카로 이마자토 공연을 갔지만 경기가 좋지 않아 극단이 해산된다. 그러다 오케레코드 사장이었던 이철이 이난영을 찾았고, 함께 노래를 하자고 부탁하게 되어 받아 들인다. 다른 곳의 주장에 의하면 이때 이난영은 태평레코드에 소속되어 음반을 취입했다고 한다. 실제로 태평레코드 9월에 <시드니 청춘>과 <지나갓 옛 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난영의 최초 취입은 오케레코드가 아니라 태평레코드다. 이후 오케레코드에서는 한 달 후인 10월에 발표된 <향수>가 최초다. 바로 이 즈음 이난영의 아버지 이남순은 1933년 8월에 사망한다. 이난영에게 1933년 파란만장한 시간이할 만한다.
오케레코드와 전속 계약이 체결되고 1933년 11월 <불사조>를 발표하고, 인기를 얻게 된다. 이듬해인 1934년 <봄맞이>까지 히트를 치게 되면서 이난영은 점점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34년 가을 이난영은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유일한 한국 가수로 출천한다. 그리고 1년 후 이난영을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알리게된 <목포의 논물>이 발표된다.
1935년 초에 오케레코드와 조선일보가 협업하여 제1회 향토 노래 현상을 모집한다.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관련된 노래 가사를 발표하는 대회였다. 이때 함흥 출신이었던 문일석이 목포에 내려와 기자 생활하고 있을 때 출전하게 된다. 무려 3000:1이란 엄청난 경쟁을 물리치고 당당히 1등을 하게 된다. <목포의 눈물> 과 더불어 <부산 노래> <평양 행진곡>이 당선된다. 처음 제목은 <목포의 사랑>이었다고 후에 오케레코드 사장이었던 이철이 <목포의 눈물>로 바꾸고, 손목인이 <갈매기 우는 항구>라는 노래의 멜로디를 달라고 하여 <목포의 눈물>을 완성한다. 이때 손목인은 허락해주는 조건인 목포 노래이니 목포 출신 가수가 부르면 좋겠다고 말해 이난영이 부르게 된다. 음반이 출시되지마자 엄청난 반응을 얻는다. 1935년 9월 신보로 발표했는데 고작 한달 뒤였던 10월 통계에 의하면 이난영은 10대 가수 3위로 올라갔고,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녀 나갔다고 한다.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한달만에 500만장 이상이 팔려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레코드 회사 앞에서는 레코드 가게 사장들이 찾아와 진을 치며 빨리 달라고 야단이 아니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 이후 이난영은 그야말로 스타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음악인 <노래 조선>을 촬영한다. 이후 김해송과 사랑에 빠져 혼전임신을 하게 되어 오케레드코드 사장이었던 이철은 둘의 결혼을 서두른다. 하지만 이 부분은 생각할 여지가 있다. 이후 이난영의 삶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김해송이 억지로 이난영을 겁탈했다는 설이 정설에 가깝다. 이후, 이난영은 슬플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심지어 자살시도를 적지 않게 하는데 김해송이 다른 가수들과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이난영이 젊은 나이에 알콜중독으로 숨을 거둔 이유도 김해송 때문으로 봐야 한다.
<목포의 눈물>로 유명해진 덕에 이난영은 오카 란코라는 이름으로 38년까지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한다. 1937년 오빠였던 이봉룡과 함께 남편이었던 김해송이 작곡한 <고향은 부른다>를 부른다. 김해송은 이봉룡에게 작곡법을 알려주며 함께 일한다. 1938년 오케레코드를 통해 <이난영걸작집>을 발매한다.
김해송은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다시 오케레코드로 넘어오면서 이난영을 위해 <다방의 푸른 꿈> 을 부른다. 이 곡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블르수 곡으로 유명하다. 1942년에는 오빠인 이봉룡이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를 불러 히트를 친다. 하지만 미국이 2차대전을 참전하면서 미국풍의 블루스 금지곡이 된다. 1939년부터 이난영은 오케레코드사에서 조직한 오케그랜드쇼단에 들어가 활동한다. 후에 이 극단은 '조선악극단'으로 바뀐다 조선악극단이 규묘가 커지면서 여러 팀으로 나누어 활동한다. 이때 생겨난 팀이 아리랑보이즈, 저고리시스터즈 등이 있다. 이난영은 장세정이 함께 출연한 저고리시터즈에 활동한다.
해방 후 활동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다. 김해송은 KPK 악단을 조직한다. 안타깝게 오케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이 해방직전인 1944년 사망한다. KPK는 조선악극단을 이어받은 셈이다. 미국들의 위문공연을 주로하면서 인기를 얻었다. 단원으로는 이난영, 장세정, 심연옥, 신카나리아, 윤부길, 백설희, 계수님, 홍청자 등이 함께 출연했다.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노래와 연극이 어루어졌다. 이 때 나온 음반이 <흘러온 남매>이며 고려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한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피난가지 못했던 김해송은 납북당한다. 납북된 이후 김해송의 소식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50년대 중반에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부산으로 내려간 이난영은 미국의 위문공연을 다니면서 자녀들을 음악가로 훈련시킨다. KPK극단을 김해송을 대신해 이난영극단으로 바꾸고 활동했으니 역부족이었다. 결국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한다.
김해송과의 관계
다시 김해송과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37년 당시 오케레코드 작곡가이자 오케그랜드쇼단의 기타리스트이자 작편곡자였던 김해송을 알게 된다. 그런데 갑자기 둘이 결혼을 발표한다. 당시 김해송은 뛰어난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자를 밝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다른 가수들과 함께 했다고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난영이 김해송과 결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지방순회 공원 때 김해송이 이난영을 겁탈하여 임신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결혼 후로도 김해송의 바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1948년 8월 18일, KPK극단은 춘천에서 공연을 했다. 밤 11시경 이난영은 소양강 백사장에 <나는 갑니다 김해송>이란 말을 적어 놓고 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했다고 핸다. 그런데 마침 순찰을 돌던 소양로팔출소의 박영훈 순경이 곧바로 들어가 이난영을 구출한다. 순찰을 돌고 있는데 한 여자가 강가에 있어서 왜 여기 있냐고 물어서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강가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이난여과 김해송이 잦은 다툼으로 자실을 시도했을 것이라 했다. KPK악극단의 단원이었던 한 명과 김해송이 바람이 났던 것이다. 저고리시스터스에 들어가 있었기에 이난영도 잘 아는 사이였던 홍청자였다.[출처 위키백과 이난영]
자녀들
이난영은 홀로 남아 자녀들을 음악가로 키워낸다. 세 딸인 영자, 애자, 숙자를 김시스터즈로 결성하여 1953년 미국 8군 부대에서 데뷔한다. 하지만 큰딸인 영자가 빠지고 조카인 민자가 들어오게 된다. 이들은 1959년 미국까지 진출한다. 미국에서 꽤나 성공하여 당시 유명한 쇼였던 설리번 쇼에도 22번이나 출연했다고 한다. 다시 라스베거스에서 주급으로 1만 5천달러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961년에는 영일, 상호, 태성이 김보이즈로 결성하여 활동한다. 결국 자녀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지내게 된다. 이난영은 집에 홀로 남게 된 것이다.
서울에 홀로 남게된 이난영은 명동에서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카나리아다방을 자주 가게 된다. 옛동료들이 그곳에 많이 왔기 때문이다. 1957년 동료가수 고복수의 은퇴 공연이 열린다. 이곳에서 이난영도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그런데 3절을 부르다가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노래 한다. 이난영이 부른 최고의 절창이다.
이때 이난영은 허무함과 고독감을 이기지 못하고 아편과 술에 빠져 살았다. 당시만 해도 아편이 그렇게 금기시 되지 않았다. 2살 어린 남인수와 알게 되면서 마음을 나눈다. 당시 남인수를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간호하러 가면서 서로 마음을 열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인수의 결핵은 생각보다 깊어 얼마후 죽음 거둔다. 이난영과 남인수는 마지막으로 <눈 감아 드리오리>를 취입한다.
두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던 박야월이 작사하고 이난영의 오빠였던 이봉룍이 작곡한다. 결국 남인수는 이 노래를 추입한 후 얼마가지 않아 이난영의 무릎을 벤 채로 사망하다. 이후 이난영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지고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된다. 남인수의 사망 이후 자녀들은 이난영을 미국으로 부른다. 1962년 12월 22일,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김시스터즈와 함께 쇼와 TV에도 출연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63년 8월 24일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1965년 3.1절 기념 가요 40년제 출연을 마지막으로 출연을 하지 않는다. 그해 4월 11일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사인은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한다. 신문 기사들은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한 세기의 별이 진 것이다.
한 많은 생을 살았던 이난영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다. 안타깝게 김시스터즈는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듣고도 오지 못했다. 요즘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고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5년 뒤에 찾아 온다.
죽음 이후
1964년 이난영의 생애를 담은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가 방영된다.
3년 뒤인 1968년 6월 23일 오전 11시 이난영을 기리기 위한 <난영 가요제>가 시작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녀에도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69년 유단산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건립된다. 목포시 대안동에서 악기점을 하던 박오주가 600만원을 기증하여 세워진다. 국내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다.
1969년 이난영과 남인수의 사랑을 담은 <이 강산 낙화유수>가 개봉한다.
1986년 사후 21년 목포시의 시민의 상을 수상한다.
1991년 잠시 폐지되었던 난영가요제가 다시 개최된다.
2003년 목포 양동에 이난영 생가 소공원이 조성된다.
2005년 이난영 기념사회회가 발족된다.
2006년 경기도 파주에 있던 이난영 묘지를 삼학도로 이전하고, 묘지를 중심으로 난영공원이 조성된다. 이곳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가 건립된다.
[참고 자료]박찬호 지음 <한국가요사 1.2> 미지북스유차영 <유행가가 품은 역사> 농민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