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레나
김세레나는 1964년 데뷔하여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가수이다. 본명은 김희숙이며 마지막 신민요 가수로 알려져 있다.
김세레나 생애
김세레나는 1946년 논산에서 태어났다. 다른 기록에는 1947년 10월 7일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기록이나 가정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1964년 12월 동아방송 가요백일장 연말결선대회에서 장원을 하여 가수로 데뷔한다. 당시 동아방송은 전국을 순회하며 노래자랑을 열었고, 최고의 순위자들을 모아 다시 결선을 치렀다. 김세레나는 마지막 결선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녀는 서라벌 예대 음악과를 다니고 있었다.
동아방송 17년사에서
.........당시 이 프로그램의 담당 PD는 작곡활동도 한 김영선 씨였다. 고수머리에 안경을 쓴 PD는 우리들의 모습을 한번 거들떠보더니 "빨리 집에 가서 공부나 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때 한결같이 교복 차림에 가방까지 들고 갔던 것이다. 고교 재학생에게는 참가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 마음먹었던 일을 쉽게 저 버리기도 힘든 일이었다. 얼마 후 이번에는 나 혼자서 찾아갔다. 물론 교복 아닌 사복을 입고 갔다. PD는 내 얼굴을 잊었는지 아무 말 없이 접수를 해주고 출연날자를 지정해 주었다. 지정된 날 밤잠도 설치다 시피하고 나갔더니 수십 명의 젊은 남녀들이 모여 있었다.
접수된 사람이 곧바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예선을 통과한 10여명이 그 주일의 프로그램 출연 자격을 얻는 것이다. 미쳐 한 소절도 불러보지 못하고 쫓겨 나가는 사람이 절반 이상이었다. 나는 강화도령을 불러 통과되어 이제 진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장소는 지금의 조선일보사 곁의 조그마한 극장이었는데 수백 명의 방청객 앞에 나선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밴드의 반주 소리도 하나의 소음으로 밖에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없이 목청을 돋우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딩동댕 하는 합격의 소리만은 분명히 들었다. 합격만 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일의 장원으로 뽑혀야 월말 결선대회에 나갈 수 있고
그 월말대회에서 역시 장원이 되어야 연말 장원 선발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노래 순서가 끝나고 기성 가수가 노래를 하는 사이에 심사위원들의 채점이 진행되는 것이다.
무대 뒤의 아마츄어들은 모두가 안절 부절했다. 드디어 사회자 한경희 아나운서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나는 단념을 했다. 그런데 세 번째로 부른 이름이 바로 내 이름이 아닌가! 그리고 세 번째로 부른 사람이 그 주일의 장원이라는 사실에 나는 내 자신의 귀를 의심했었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가운데 아나운서와 몇 마디 나누었는데 무슨 얘기를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연말대회에서 나는 또다시 장원으로 뽑혔고 1964년 12월 20일 남산의 드리마 센타에서 DBS가요 백일장 연말대회에서 나는 당당히 장원으로 뽑혔다. DBS 동아방송이 뽑은 초대 가요 장원이 된 것이다. DBS가 한국 가요계에 진출시킨 초대 가수가 바로 내가 된 것이다.
[출처: 김세레나 (김희숙) 민요계의 여왕으로 사랑받던 가수]
데뷔 이후 김세레나는 발표하는 곡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고, 전국 최고의 민요가수라를 타이틀을 거머쥔다. 1967년 <짚세기 신고 왔네> <울릉도 사랑>이 히트했다. 그 전까지 명확한 장르가 없었지만 사람들은 신민요의 노래에 유독 사랑을 주었고, 그후부터 자신도 신민요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1967년 그해, 김세네라는 제1회 서라번 가요 대상에서 민요상을 수상하고, 10대 가수상 등 다른 가요제에서 상을 휩쓴다. 선배 가수들이 불러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을 자신이 불러 더 유명해지기도 한다. 일반 트로트도 잘 불렀지만 김세나의 장기는 신요풍의 노래였다. <새타령> <성주풀이> <쑥대머리> 등의 신민요의 노래들은 남도창을 배운 그에게 매우 적합한 노래들이었다.
김세레나가 민요풍에 노래에 유독 강했던 이유는 그녀가 박초월(朴初月) 판소리 명창에게 발성을 사사 받았기 때문이다. 최근들이 송가인을 비롯한 다수의 트롯 가수들이 깊고 뛰어난 발성이 뛰어난 이유는 판소리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보가수'라는 호칭을 주었다. 전두화, 노태우, 김대중, 김영상 대통령 시절 노래했다고 한다. 특히 박정희가 무척인 좋아했는데 이를 시기한 육영수 여사가 방송 3사에서 모두 출연금지 명령을 내렸다.
70년대 초반 스무살이던 그녀는 육영수에 의해 하루아침에 KBS MBC TBC 등에서 방송출연 금지당한다.. 너무 상심하고 두려웠던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방송정지 며칠 뒤 중앙 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주최하는 파티에 갔다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풀어 줬다고 한다.
“이후락씨와 제가 스캔들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건 아니었어요. 아버지처럼 편하게 보살펴주시는 분이었죠. 정·재계 내로라하는 분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건 사실이에요.”
그 외에도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등과도 친분이 있어 대형 건설 수주를 위해 바이가 오면 파티를 열 때 자주 불려 나가 노래를 했다고 한다. 두 번의 결혼을 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하고 현재는 홀로 살아가고 있다. 종종 가요 무대 등에 출연한다.
[자료 출처]
스포츠경향 김세레나, “육여사가 방송금지, 이후락씨가 풀어줬다.”
박찬호 지음 이준희 편집 <한국가요사 2> 미지북스
김세레나 히트곡
짚세기 신고 왔네 / 1967년
울릉도 사랑 / 1967년
금수강산
둥둥 내사랑
닐니리 강산
새타령
성주풀이
남원산성
쑥대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