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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황금심 생애와 히트곡

by Ἀμφίων 2022.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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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심 생애와 히트곡

 

  • 황금심의 본명은 황금동이며 부산광역시 출신이며, 일제강점기 시대와 해방 후 활동한 대한민국 가수이다.

황금심
황금심

[생애]

 

황금심은 1921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무남 7녀중 막내로 출생한다.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구이다. 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들은 경성 즉 서울의 청진동으로 이사한다.

 

서울로 이사한 가족은 여관을 운영한다. 당시 가수와 배우들이 황금심의 여관에 자주 들러 묵고 가곤 했다. 어린 황금심은 호기심에 그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했고, 그들은 황금심을 잘 대해 주었다고 한다. 어느날은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화류춘몽>를 부른 이화자도 만났다고 한다. 황금심에게 노래를 시켜보고 그에게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주 그를 찾아와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1936년 오케레코드 전수 가수 선발 오디션이 있는날 황금심도 찾아갔다. 예상치 못하게 황금심이 1등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오케레코드는 이난영, 장세영 등 유명 가수가 음반 출시 예약이 되어 있어 황금심에게는 여유가 오지 않았다. 이 때 스카우트의 귀재 박노홍이 찾아와 황금심을 빅터레코드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서 빅타레코드 전속 작곡가인 전수린을 만나 알뜰한 당신을 취입하게 된다. ‘알뜰한 당신은 발표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다.

 

박찬호는 여기에 살짝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다. 어느 날 황금심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던 한 청년이 흘러나오는 노래에 매료가 되어 그 소녀를 불렀다. 그 청년은 빅타레코드 문예부장이었다. 그 다음날 곧바로 소녀를 찾아가 전속계약을 맺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미 오케레코드와 계약을 맺을 상태에서 황금심이 빅타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것이다. 계약의 의미를 몰랐던 탓에 이중 계약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당연히 빅타레코드에는 알리지 않았으므로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오케레코드의 김상진은 황금심을 손목인과 박시춘에게 소개해 손목인은 <지는 석양 어리 하리>, 박시춘은 <왜 못 오시나>를 작곡해 두었다고 한다. 황금자로 이름으로 녹음해 19382월 신보로 발매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빅타레코드에서 데리고 간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오케레코드는 전속계약을 맺지 않을 때였다. 결국 빅타레코드에서 <알뜰한 당신><한양은 천리원정> <저도 몰라요> <마음의 항구>를 녹음해 가지고 있었다. 이때 빅타레코드의 이부풍이 황금심이란 예명을 붙여 주었다. 이들도 2월 신보로 발매하게 된다.

 

철모르는 소녀의 실수로 인해 오케레코드와 빅타레코드는 법정문제까지 일어나게 된다. 결국 주변의 설득에 의해 서로 화해하게 된다. 당시 오케레코드는 많은 가수가 있어 빅타레코드로 보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황금심은 오케레코드와 빅타레코드 두 곳에서 데뷔 앨뱀을 내고 말았다.

 

황금심이 노래를 한다는 말을 들을 부모님은 그녀를 집에 가두고 내 보내 주지 않았다. 황금심은 노래를 못하게 하면 죽겠다면 식음을 전폐하자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었다고 한다.

 

반도악극좌에서 활동할 당시 무대 공연을 하면서 고복수와 가까이 지낸다. 당시 악극좌는 극장이나 무대들을 설치하여 연극과 노래를 같은 하는 현재의 오페와와 같은 형태였다. 막이 내리는 중간중간에 노래 부르는 가수를 막간가수라 한다. 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무대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했다. 이 와중에 고복수와 눈이 맞아 기차 안에서 사랑을 나누게 된다. 황금심 집안에서는 노래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은데다 또 사귀는 남편가지 가수라고 하자 극부 반대한다. 하지만 황금심의 고집도 보통이 아니었는지 부모님의 고집을 꺾고 1941년 고복수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고복수와 그 악극단을 만들어 일본의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고, 강제 노동을 하고 있던 재일 조선인들을 찾아가 위문공연을 했다고 한다.

 

해방후 고복수 부부는 전옥이 이끄는 백조가극단에 들어가 활동한다. 고복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15주년 행사를 치렀다. 안타깝게 아버지는 기념 공연 도중에 숨을 거두고 만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고복수는 인민국에게 연행되어 명동성당에 갇히고, 평안남도 순천까지 붙들려 간다 탈출하여 살아난다. 육군 정훈공작대에 들어가 위문대원으로 활동한다. 휴전이 되자 두 사람은 계속하여 노래를 이어간다.

 

황금심은 <삼다도 소식>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뿐 아니라 <똥 따러 가세> <장희빈> 등도 사랑을 받았다. 1957년 고복수는 은퇴식을 거행하고 순회공연을 갖는다. 그 돈으로 회사를 차려 운영했지만 경영에는 소질이 없어 풀리지 않는다. 1959년에 <타향살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역시 흥행에 실패하고 당시 빚만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지고 만다. 고복수는 재물운이 정말 없었는가 보다.

 

황금심과 삼다도소식 앨범
황금심과 삼다도소식

황금심

 

1960년대 부부는 재일 한국인을 찾아가 위문 공연을 하며 지낸다. 지난날 사랑 받았던 노래를 대취입하여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고복수는 1972210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둔다. 그의 나이 향년 60이었다. 황금심은 남편의 병원비를 대기 위해 수많은 활동과 노래를 해야 했다. 황금심은 고복수의 죽음 이후에도 종종 활동을 했으며, 방송에도 출연을 했다.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1996년 파킨스병을 앓게 시작하고 200178세의 나이로 별세한다.

 

황금심 노래는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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