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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작곡가 박춘석 생애와 히트곡

by 꿈꾸는몽당연필 2021.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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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석 생애와 히트곡

 

작곡가 박춘석

 

박춘석

 

서울 토박이인 박춘석의 본명은 박의병이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그는 해방 후 재즈 피아노를 잘쳤다고 한다. 당시는 피아노가 귀해 쉽게 구경도 힘들었다. 하지만 가정이 부유했던 부모님 덕에 박춘석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워 매우 능숙하게 다루었다. 길옥균의 권유로 김영순이 조직한 학생 악단에 가입해 활동한다.

 

1946년 경기중 4학년의 열여섯살의 소년이 미군 전용 업소였던 '황금 댄스홀'에서 피아노를 쳤다. 당대 최고의 연주자로 꼽히던 엄토미의 클라니넷, 최상용의 트럼펫 등과 호흡을 맞추었다.

 

본명인 의병(義秉)이지만 춘석이라는 이름은 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집에서 불린 이름이었다고 한다. 매우 어릴 때부터 음악 신동이었다. 부모를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을 알아보고 악기를 배우도록 배려했다. 네 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고 전해진다. 봉래소학교와 경기중을 다니면서 독학으로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독학으로 배운다. 유성기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곧바로 연주할 만큼 뛰어난 기억력과 음악성을 가졌다고 동생인 박금석이 증언하기도 했다.


1949년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피아노를 전공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현 경희대인 신흥대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한다.


1954년 백일희의 <황혼의 엘레지>를 작곡한다. 이후 박춘석은 띄어난 재능으로 수많은 곡들을 쏟아낸다. 아마도 박춘석을 세상에 알린 노래는 <비 내리는 호남선>일 것이다. 손인호가 불러 대 히트를 친다.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 박담마의 <아리랑 목동> 등을 발표한다.

 

남진 <가슴 아프게> <마음이 고와야지>
패티김 <초우>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람>
나훈아 <물레방아 도는 내력>
은방울 자매 <마포종점>


이처럼 박춘석은 7-80년대 히트곡을 주도했다. 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1978년에는 엔카의 여왕으로 불리는 미소라 히바리에게 곡을 주어 최초의 외국인에게 곡을 주기도 했다.


박춘석을 결혼하지 않았다. 박씨는 2700여곡을 작곡하였다.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이후 칩거하면서 투병하다 2010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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