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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박시춘

by Ἀμφίων 2021.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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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춘

박시춘

1. 인물 정의

박시춘은 1913년 10월 28일, 일제강점기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길이남을 위대한 명곡을 남긴 작곡가, 기타 연주자, 영화제작자였다. 특히 수많은 히트곡의 작사가였다. 1996년 6월 30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2. 박시춘의 생애와 노래들

 

 

박시춘의 본명은 박순동(朴順東)이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으면 본과 역시 밀약 박 씨다. 1913년 10월 28일 태어났다. 밀양에서 밀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요계로 들어간다.

박시춘의 아버지는 밀양에서 유지였다. 당시 기생들을 양성하는 권번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수많은 인맥과 권력층과 친밀한 관계였다. 어릴 때부터 많은 악기를 배웠고, 작사작곡법까지 배웠다고 한다. 당시로서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수업?을 받은 것이다.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다 시에론에코드사의 이서구, 박영호 등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1931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대히트를 치면서 박시춘의 인생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한다. 아니, 이미 그는 당시 금수저였다. 하여튼 그렇게 그는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그가 쓴 곡들은 당대 내노라하는 가수들이 불렀고, 또한 히트를 쳤다. 송민도의 <고향초>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 현인의 <신라의 달밤> 백난아의 <낭랑 십팔 세> 등 그의 히트곡은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작곡한 곡은 무려 3천 곡이 넘는다.

 

현인의 <신라의 달밤>


박시춘은 무엇보다 전쟁 관련 노래에 인연이 깊다. 신세영의 <전선야곡>을 비롯하여 군가인 <전우야 잘 자라>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를 비롯하여 남인수의 그 유명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 등 한국 전쟁과 관련하여 박시춘을 빼고 이야기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실제로 한국 전쟁 당시 박시춘은 한국 정훈국 소속으로 활동하며 군인들을 위문했다.

 



1950년대에는 영화제작에도 참여하여 감동과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한다. 1956년에는 <청춘쌍곡선>의 단역배우로도 출연한다. 1958년 <삼등호텔>을 제작했고, <딸 칠형제>의 영화 연출을 맡기도 하는 등 다양한 재능을 선보였다.

 

영화 <삼등 호텔>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1961년 한국연예엽협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서훈했다. 대중가요 작곡가로서 최초의 문화훈장이다. 이후 나이가 들면서 활동이 뜸해졌다. 가끔 가요무대 등에서 출연했다. 1996년 6월 30일 84세로 사망한다.

 

친일 논란

 

박시춘의 대표적인 친일대표주자이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으로 확장하면서 수많은 징병제를 실시했는데 이때 일제는 문학가와 예술인을 동원하여 징용제에 참여하도록 강제한다. 이난영을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계의 거물들이 동참한다. 박시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지원병에 참전하는 것이 소원이라는 내용의 혈서지원을 비롯한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목단강 편지, 등의 수많은 친일가요를 작곡했다. 많은 사람들이 친일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박시춘은 도가 지나칠 정도록 강한 내용이 많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박시춘을 기념한 가요제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는 등의 문제가 일어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만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 되기도 했다.

 

 

혈서지원(1943)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 놓고 성수만세 부르고

한 글자 쓰는 사연 두 글자 쓰는 사연

나랏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결사대의 아내

상처의 붉은 피로 써 보내신 글월인가
한 자 한 맘 맺힌 뜻을 울면서 쓰셨는가
결사대로 가시던 밤 결사대로 가시던 밤
이 편지를 쓰셨네

세상에 어느 사랑 이 사랑을 당할손가
나랏님께 바친 사랑 별같고 해와 같애
철조망을 끊던 밤에 철조망을 끊던 밤에
한 목숨을 바쳤소

한 목숨 넘어져서 천병만마 길이 되면
그 목숨을 애끼리오 용감한 님이시여
이 안해는 웁니다 이 안해는 웁니다
감개무량 웁니다

 

2019년 밀양시는 밀양시 출신의 가수 및 작곡가 등을 한 곳에 모아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많은 밀양시민들은 의명과 독립운동의 성지인 밀양에 친일행적을 가진 박시춘이 함께 한다는 것에 드세게 반대했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은 "시민 정서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겠지만 이를 원하는 시민들도 있다. 의열기념관 건립 때도 논란이 많았다"며 "약산 김원봉 월북 사실을 적시하겠다고 하고 지었고 가요박물관도 그런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밝혔다. 특정 개인을 부각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밀양 출신 음악가들의 음악 세계를 두루 보여줘 시민들의 자산으로 만들면서 밀양을 알리는 또 다른 관광상품으로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기사의 일부 [출처 연합신문]

 

박시춘의 곡들은 좋아하고 즐겨 부르지만 그의 친일행적인 진정성이 많이 묻어난다. 즉 억지로 친일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 의외로 과도하게 충성한 듯한 내용이 너무 많다. 이러한 성향은 이승만을 추종하는 수고보수세력의 성향과 그대로 닮아 있다. 이들은 일제의 강제징용에서 '강제'를 빼야 된다고 주장하고 '자원'해서 갔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일본보다 더 일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다. [참조 비디어워치 만들어진 근현대사, 일제시대 “강제징용”이라는 신화] 친일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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