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usicNews

덕성여대 메이퀸 살인사건

by Ἀμφίων 2021. 6. 16.
반응형

덕성여대 메이퀸 살인사건

 

이화여대에서는 오래전부터 당대 최고의 여성을 가리는 메이퀸 대회가 있었다. 미스코리아와 같은 맥락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단 <이화여대 메이퀸 대회>를 참조 바람) 그해 메이퀸이 발표되면 각 신문사들을 앞을 다투어 보도할 만큼 유명했다. 가족관계와 취미, 신장, 이전 학교까지 보도했다. 메이퀸 선정은 당시 많은 학교에서 진행되었다. 

1971년 덕성여대에서도 메이퀸이 선발되고 끔찍한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메이퀸으로 당선된 ㅇ양이 호텔의 17층에서 떨어져 숨진 것이다. 처음에는 오빠 친구의 청혼을 거부하다 스스로 투신했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조사를 하면서 스토커의 살해임이 밝혀진다. 살해범 이 모 씨는 이렇게 자백했다.


"겁탈해서라도 내 사람을 만들어 결혼하려 했으나 반항해 칼로 찌르고 목을 졸라 객실 밖으로 떨어트렸다."
1971년 9월 1일 재판석에서..


이 사건은 무기징역과 무죄, 무기징역, 무죄로 계속하여 번복되었다. 대법원은 살해범에게 징역 10년을 판결했다. 이후 대중은 메이퀸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되었다. 학업에 전념해야할 학생들이 메이퀸이 되기 위해 의상과 화장 갑의 액수가 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10월 유신이 발생하게 되고 여러모로 어지러운 상황이 만들어진다. 결국 1978년 5월 이화여대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24개 과가 메이퀸 선발을 거부했다. 

1976년 5월 이화여대 메이퀸 임현숙

이화여대 메이퀸 대회

 

이화여대에서 처음 시작한 메이퀸은 이후의 메이퀸과는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1908년 22회 이화학당 개교기념식에서 창립자였던 미국인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튼 부인에게 꽃을 엮어 관으로 만들어 드리면서 메이퀸이란 칭호를 주었다. 그러니까 처음 시작은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된다. 

1927년부터는 학생들 사이에서 메이퀸을 선발하는 것으로 변경된 것이다. 어떤 이유인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당시 선정 기준은 기독교 학교 답게, 
좋은 성적(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품행(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어야할 좋은 성품)
신앙이었다. 그것도 모든 학생이 아닌 졸업 예정자인 4학년들이었다. 그러니까 미를 기준으로 뽑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시대를 앞서가던 이화여대가 한복에... 이것도 전통문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했다고 한다.

초기 이화여대 메이퀸 


그러다 일제의 탄압으로 1933년부터 중단된다. 그러다 개교 70주년인 1956년 다시 시작된다. 

"각 대학 각 학과 4년 급에서 개신교 신자로서 신앙이 돈독하며 성적과 품행이 우수하고 활동적이며 지도자격이 있는 대표덕 인물"

각 과에서 한명씩 후보 선출하여 교수와 동창생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 최종 투표로 최고 득표자가 메이퀸으로 선출되었다. 

 

1978년 완전히 폐지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