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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

홍도 차홍녀의 생애

by Ἀμφίων 2021.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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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차홍녀의 생애

1918-1940

 

차홍녀는 몰라도 홍도는 안다. 아니 홍도가 그냥 서해안의 섬인 줄만 알았더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있으니... 연로한 분들에게 <홍도 우지말라>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전쟁이라는 역사의 폭풍을 지나온 사람에게 운명과도 같은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에 아픈 역사 속에서 태어났지만 1950년 박재홍에 의해 다시 불리면서 다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홍도야 우지마라>에 읽힌 이야기는 이렇다. 비수기였던 여름의 극단들은 임선규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때 홍도 역에 차홍녀가 배정되면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게 된다. 이제 차근차근 차홍녀의 생애를 뒤져 가보자.

차홍녀는 1918년 경기도 연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언니는 연화라는 이름을 가진 기생이었다고 한다. 의정부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친지의 권유로 극단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다지 예쁘지 않았던 차홍녀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희락좌, 신무대, 황금좌 등의 극단을 전전하다 동양극장의 연출가인 박진에 눈에 띄게 된다. 1935년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당시 극단 이름들은 죄다 '좌'를 달았다. 궁금하네….) 박진은 차홍녀의 첫인상이 '흙 묻은 김장 무 같아서 두들겨 만들기 쉽다고 생각했다'라고 한다. 당시 청춘좌에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소영, 김선영, 김선초 등은 당대에 최고의 배우들이었습니다. 차홍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었다. 지방 출신에다가 신인이었던 차홍녀는 대중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차홍녀는 일본명작주간에 상영된 <영아살해>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맡게 됩니다. 날품팔이하며 살아가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다. 뭐라도 먹으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젖먹이를 돌봐야 하는 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끝내 자신의 아이를 살해하고 순사에게 울먹이며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는 이야기다. 연기가 꽤 괜찮았던지 사람들은 차홍녀를 주목하게 된다. 차홍녀의 연기를 살펴보던 박진은 차홍녀가 좋은 배우가 될 거라며 격려해 주었다. 박진은 차홍녀에게 연기지도를 하며 키워나간다. 빼어난 외모는 아니었지만, 연기를 시작하면 꽤 몰입하던 성격인 탓에 차홍녀의 연기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단기간에 동양극장 전속 극단인 청춘좌의 중심에 다가갔다. 

당시 당대 최고의 배우들만 맡는다는 <춘향전>의 춘향역 맡게 되면서 그녀가 얼마나 인기를 얻어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춘향전>은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1936년 7월이 되자 동양극장 간부들은 고심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공연장에 에어컨이 있다면 여름철이 더 시원하겠지만 당시는 어두컴컴한 실내에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실내에서 연극을 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름은 극단의 비수기였다. 어떻게 하면 여름을 손해 보지 않고 무사히 넘길까를 고민한다. 그렇게 해서 올린 첫 작품이 원탄 박종화가 쓴 <황진이>를 각색한 <명기 황진이> 이였다. 7일 동안 열린 연극은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두 번째 연극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각색한 작품이었다. 단종의 슬픈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라 그런지 지방의 유생들이 많이 왔다는 소문이 있다. 무더운 여름 공연에 극장 바닥이 땀으로 흥건할 만큼  흥행을 했다. 하지만 이왕직에서 중단을 요구해왔다. [이왕직(李王職)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대한제국 황족의 의전 및 대한제국 황족과 관련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로, 대한제국 시기에 황실 업무를 담당하던 궁내부를 형식적으로 계승한 기구이다. 또한 폐지된 조선 장악원의 기능인 아악 등도 편입되었다. 1910년 12월 30일에 창설되어 1946년 1월 31일 폐지되었다. 이왕직의 수장은 장관으로 대신 급이었으나, 일본 본국의 궁내부 대신의 지휘를 받았다. (출처 위키백과 이왕직)]

어쩔 수 없이 <단종애사>는 불과 8일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다음 연극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막을 내려야 할 처지가 되었다. 지배인 홍순언은 무명의 극작가였던 임선규가 동양극장에 입사할 때 제출한 극본을 생각해 냈다. 박진과 최독견이 모여 임선규의 극본을 놓고 설전이 일어났다. 두 사람은 내용이 너무 신파적이라 반대했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었던 터라 제목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고치고 공연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임선규가 처음부터 당시 청춘좌의 배우였던 홍철과 차홍녀를 염두에 두고 두 명을 주인공으로 하여 만든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두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주인공의 이름도 배우들의 이름을 따서 황철은 철수로, 차홍녀는 홍도로 지었다. 오빠 철수의 학비를 위해 여동생인 홍도는 기생이 된다. 오빠의 친구였던 광호와 홍도는 사랑하게 되어 반대를 무릅쓰고 둘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차마 볼 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홍도의 남편인 광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홍도가 싫었던 시어머니는 모진 박해를 하다 결국 홍도를 집에서 쫓아낸다. 유학에서 돌아온 광호는 어머니의 말에 속아(속기는 무슨...) 부유한 집안의 여인과 약혼을 하게 된다. 시어머니에게 버림받고 남편에게서까지 버림받은 홍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약혼식장에서 칼로 약혼녀를 살해한다. (참.... 시어머니나 남편을 살해냐지.. 어떻게 보면 아무런 잘못된 없는 약혼녀를 왜 살해하는지) 신고를 받고 찾아온 순사..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사는 자신의 오빠였다.



 

홍도야 우지마라, 김영춘, 1939년

홍도야 우지마라 작사 이서구(이고범) 작곡 김준영 노래 김영춘 발표 1939년 <홍도야 우지마라>는 1936년 악극 "사랑에 속도 돈에 울고"의 삽입극이다. 원노래는 대사가 들어가 있다. 1958

old-music.tistory.com

연극은 대성공이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연극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았다. 연극이 열리는 날이면 수많은 사람이 연극을 보기 위해 동양극장 앞에 몰려들어 앞을 지나던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도 민원이 발생하자 서대문 경찰서에서는 경찰들을 파견하여 질서를 유지하게 했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고 하니 상상이 간다.

한 번은 경성 시내 기생 500여 명이 일시에 찾아와 함께 웃고 울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경성 시내 술집이 거의 문을 닫을 정도였다고 한다. 자신들의 삶과 너무나 닮은 연극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연극 삽입곡이며 연극의 주제곡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1절 가사 마지막 부분에 "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울었소" 부분이 흘러나오면 관중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남일연 노래


1.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 마오
마음은 푸른 하늘 흰구름 같소
짓궂은 비바람에 고달퍼 운다
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울었소.

2.열여덟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낙화란 왠 말이요 야속하구려
먹구름 가시면은 달도 밝겠지
내 어린 이 순정을 바칠 길 없소.

3.사랑도 믿지 못할 쓰라린 세상
무엇을 믿으리까 아득하구려
눈물도 인정조차 서런 사정도
가슴에 주서 담고 울고 가졌소.

 

남일연이 부르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남일연이 부르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어떤 기생은 이 노래를 듣고 자신의 생을 비관하여 한강에 투신하여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사람들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더 보기 위해 동양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극장은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수십 번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단 한 번도 객석이 비워진 적이 없었다. 기생들이 자주 오자 꽃을 보려고 몰려든 벌떼는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여튼 <사랑에 속고 울에 울고>는 초대박 그 자체였다. 동양극장의 마르지 않는 돈줄이 되었다. 이 연극 하나로 임선규는 무명에서 일약 스타 작가가 되었다. 주인공을 맡은 황철과 차홍녀는 그야말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입지를 다졌다.


서울공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이제 지방으로 공연을 돌기 시작했다. 영화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회식 연극이다 보니 지방에서도 연극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요청이 빗발쳤다. 그렇게 <사랑이 울고 돈에 속고>는 전국민을 울리게 된다. 그러다 1940년 12월, 철원 극장 공연을 끝으로 북선 순회공연을 마친 아랑의 단원들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철원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12월이라 얼마나 추웠던지 단원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옷깃을 여몄다.

오랫동안 순회공연을 하고 주인공 역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공연을 마친 차홍녀의 몸은 썩 좋지 않았다. 그런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거적을 쓰고 웅크리고 있던 거지를 발견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1원을 적선하고 기차에 오른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차에 오르면서 차홍녀는 열이 났고, 헛소리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온몸에 발진이 돋아 괴물처럼 보였다. 당시 마마라고 불린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당시 천연두는 지금은 후천성면역결핍증처럼 약이 없었다. 사람들은 공연을 마친 후 지친 몸이었던 차홍녀가 거지에게 적선하면서 균이 옮겨온 것이라 여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진은 차홍녀의 집에 찾아가 천연두를 앓고 있던 차홍녀를 안고 통곡을 한다. 지방극단을 전전하던 차홍녀를 발견하고 동양극장에 데려온 박진은 차홍녀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이다. 죽어가는 차홍녀를 바라보는 박진은 원통하기 그지없었다. 며칠 뒤 22세라는 짧디 짧은 나이로 차홍녀는 눈을 감는다. 유난히 마음이 착했던 차홍녀와 그러한 마음을 알았던 수많은 사람은 홍제동 화장터로 가는 운구행렬을 이어 나갔다. 수많은 사람은 뒤따라가며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1939년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이때 <홍도야 우지마라>는 대히트를 친다. 4월에 앨범으로 발매가 되는데 수만장이 팔려나갔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만 장이 팔 나간 셈이니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은 것이다. <홍도야 우지마라>는 본 주제가가 아니었다. 본 주제가는 남일연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이 곡은 타이틀곡이자 A면에 실려 있었다. 이 노래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B면에 실린 <홍도야 우지마라>는 대 히트곡이 되었다.

<홍도야 우지마라>를 부른 김영춘은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콩쿠르에 입상하여 가수가 되었다. 이 노래 외에도 <항구의 처녀설> <항구의 여자> 등을 물러 유명해졌다. 그러나 노년이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2006년 홀로 살아가다 눈을 감았다. 김영춘의 본명은 김종재이며, 향년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죽기 10개월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후유증으로 병원에서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자료 출처]

 

박찬호 <한국가요사1>미지북스

오마이뉴스 '홍도'로 살다 간 여배우 차홍녀

위키백과 이왕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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